문학을 배반한 나의 숨쉬기 운동, 글쓰기

문학을 배반한 나의 숨쉬기 운동, 글쓰기

문학을 배반한 나의 숨쉬기 운동, 글쓰기

글. 단추/ 여성주의 이야기꾼

1. 엄마의 언어에서 아버지의 문학으로?

우리들 각자가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외국어와 같은 것- 어디에도 인당수는 없습니다 어머니, 우리는 스스로 눈을 떠야 합니다 – 김승희

스물네 살의 엄마는 갓난 딸에게 꽃 이름도 알려주고, 나무 이름도 알려주고, 간판도 읽어주고, 아침 신문도 읽어준다. 발음할 수 없는 음표들은 노래로 들려주고, 들려줄 수 없는 그림들은 하늘에 걸어두면서, 갓난 딸애가 커서 그것들을 자기 스스로 표현하게 되기를 기다린다.

엄마. 이것은 뭐라고 해? 응. 그것은 손톱깎이라고 해. 엄마. 보람차다가 무슨 뜻이야? 응. 그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을 하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면 스스로를 칭찬할 때 할 수 있는 말이야. 엄마. 나 오늘 보람차게 똥쌌어. 엄마. 나 오늘 보람차게 손톱 깎았어. 엄마 나 오늘 보람차게 나비랑 놀았어….

시인의 아이들은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자랐을 터인데, 나는 연습장 종이를 뜯어먹는 친구와 함께 사물함에 비밀스러운 쪽지들을 쌓아두며 편지 끝에 쉼표와 느낌표를 가득 그려넣으며 자랐다.

글쓰고 그림 그리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도 없고 재미도 못느끼는 나의 골방 속 사춘기는 원고지와 함께 지나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백일장에 나가고, 쉼표들을 그려 넣으면서, 나를 둘러싼 세상과 사람들의 이야기들과 친해져 나갔다. 결국, 나는 내가 얼마나 못생겼는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쓴 원고로 인해서, 문학특기생으로 국문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에게 당시, 글쓰기는 문학과 동의어여서, 한국 문학사의 아버지들과 어떻게 친해져야 하나 고민하고, 강단 위의 아버지와 어떻게 싸워야 하나 고민하였다. 문학은, 내가 목매고 죽어도 좋을 나무라고 굳게 믿으며, 나무가 쑥쑥 커가기를 바랐다. 그때는, 그 나무가 이 척박한 토지와 쇳덩이 같은 장애물들 속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휘청인다고 생각하지 못했었다.

2. 거기 있는 ‘그’의 이야기가 아니고, 다시 찾은 ‘나’의 이야기

이 길에선 따뜻한 내면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이 거울 속 추위를 다 견디려면 나 얼마나 더 뜨거워져야 할까 – 김혜순

이제와서 말하건대, 솔직히 나는 채만식도, 주요섭도, 김동인도, 황순원도, 김승옥도, 최인훈도, 이청준도, 이문열도, 이인화도, 떨리고 싶지 않았다. 문학과 지성사의 레이블에 빛나는 작가들과도 나는 괴리감을 좁힐 수가 없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남성의 이야기이고, 남성의 이야기는 서울의 이야기이고, 서울의 이야기는 한국의 이야기이고, 한국의 이야기는 온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종류의 비판이 되는 것이 나를 따돌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문학이라는 권력의 바퀴 안에 들어가지 않고도, 주변인으로서 느끼는 내러티브 안에서의 소외감은, 비단 일개 작가 지망 대학생 나 혼자뿐만은 아니었으리라.

가끔 나는 공지영도 싫고, 은희경도 싫고, 박완서도 싫었다. 나의 삐딱한 마음은 남성문학판에만 돌려져 있는 것은 아니었나보다. 어떤 이야기들, 희생자의 반전없는 쓸쓸함과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휼륭하노라 류와, 네가 가진 힘과 발언권을 나에게도 달라 주의는 나의 목마름에 짠기만 더하는 바닷물 같았다. 아침 드라마에서 질질짜는 며느리들이 싫듯이.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나의 이별은 잘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뤄진다 – 이소라

그래서, ‘그’의 문학과는 안녕.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부단히 애쓰느라 나를 소외시키는 그들의 글쓰기는 안녕. 고독하려고 뽐내는 현대문학의 무거운 옷들이여 안녕. 별것 없는 인생, 별볼일 없는 사람들의 그림자는 안개속으로 묻혀지는, 거대서사여 안녕.

그리고 내가 다시 찾은 글쓰기는 미즈와 언니네에서 비롯되었다. 나의 이야기 꺼내기, 언니의 이야기 들어보기, 언니와 나의 이야기를 다시 엮어내기, 나의 이야기를 다시 말하기. 어쩌면 부끄러운 내면의 고백들, 누군가 옳다 혹은 그르다고 할까봐, 겁났던 욕망들, 어젯밤 치사하게도 삐져버린 소소한 사건들과, 약한 의지와 열등감 때문에 우습게 이어지는 일상의 이야기들을.

3. 여성으로서의 글쓰기, 욕망의 구체화

숨겼던 이야기들 부끄럽지 않고 빛나는 입술로 원하던 목소리로 세상이 원한대로 움직이고 않고 감췄던 날개로 하늘을 나는 그대가 아름다워 – 지현

글을 쓰면서, 일어난 일들을 서술하고, 기억을 다시 편집하고,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여성의 글쓰기, 여성적 글쓰기가 유독 매력적인 것은 왜일까?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 훨씬 더 박진감 넘쳐서? 모험과 투쟁으로 가득한 드라마의 구성이 재미있어서?

나는 왜 글쓰기를 숨쉬기 운동처럼 멈출 수가 없고 그안에서 다시 살게 되는 것일까? 글을 쓰는 것은, 점을 보는 것과 같다. 어제의 일들과 운명과 달과 행운을 빌어서, 내일을 바라다 보는 것과 같다. 내가 살아온 짧은 역사의 순간들에 방점을 찍어주면서, 이제는 나의 전환점이 왔음을 깨닫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무엇에 힘을 주어야 할지 알게 해주는 일.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땜에 내일은 행복할거야 – 심수봉

욕망을 구체화하지 않으면, 희망은 없다. 꿈꾸는 것이 있어야 이룰 수가 있고, 글쓰기는 꿈을 꾸는 행동이다. 그것이 일상적인 일들의 기록이든, 사랑 타령이든, 욕지거리이든, 머릿 속을 후리고 지나가는 한 줄의 문장이든, 오랜시간 공을 들여 쌓아올린 첨탑같은 소설이든, 글을 쓸 때에는, 꿈을 꾼다. 기억의 꿈, 상상의 꿈, 만남의 꿈, 욕망의 꿈.

한 밤에 눈물로 쓴 편지를 아침에 읽고 가슴을 쓸어 내리듯이, 지나간 기록들을 되찾아보면 얼굴이 빨개진다. 부푼 감정도, 잊으려고 축소한 이야기들도, 그 안에 남아서 다시 되돌아온다. 누군가가 알아봐주기를, 누군가가 비평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겠다. 남성 작가들이 오른쪽에서 바라본 떡갈나무를 나는 왼쪽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새로운 시선을 말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몸을 휙 돌려, 베란다에 화분을 보리. 나는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가서, 다른 것을 보리. 그것과 만나는 나를 다시 만나리. 네가 오른쪽에서 보았다는 떡갈나무는 나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

아암 째째한 인생은 당당하므로 나는 하품하는 여자를 좋아합니다 나는 지루하고 지루한 여자를 좋아합니다 나는 게으르고 인색한 여자를 좋아합니다 나는 삭막하고 황량한 여자를 좋아합니다 나는 단물이 다 빠진 여자를 좋아합니다 나는 머리 속에 오직 남자밖에 든 게 없는 여자를 좋아합니다 (좋아하려고 목하 노력합니다) – 고정희

그리하여 우리의 글 속에서 완구점 여인(오정희) 이 나올지, 귀신 이야기(김행숙)가 나올지 염소를 모르는 여자(전경린)가 될는지는 모른다. 활자로 인쇄되지 않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보여지지 않고 켜켜히 비밀의 산이 될는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엄마에게 새로운 언어들을 전해주고, 우리는 어떤 단어들은 고치기로 할지도 모른다. 선택들은 아직도 열려있다. 우리들이 글을 써내려가는 순간, 세상에는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았던 수많은 서사들로 바글바글 댈 것이다. 아직도 다 말하여지지 않고, 다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땀처럼 올라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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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언니네(www.unninet.co.kr) 2005년 10월 특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있기를 거부한다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