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크백마운틴, 안과 바깥의 풍경

브로크백마운틴, 안과 바깥의 풍경

지난해 12월 21일을 기점으로, 벨기에,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독일, 아이슬랜드, 네델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스웨덴, 일부의 캐나다와 일부의 미국에 이어서 영국에서도 동성애자들의 시민동반자법(civil partnership)이 가능해졌다.

시민동반자법(Civil partnership)은, 네델랜드나 벨기에에서처럼 이성애 결혼과 동등한 결혼의 의미는 아니지만, 법적으로는 이성애 결혼과 다름없는 합법적인 권리가 주어지게 되었다. 이제 한집살이를 하게 되는 장점으로, 예식을 합법적으로 치룰 수 있게 되거나, 세금이 감면되거나, 외국인이더라도 파트너의 권리로 비자를 얻게 되거나, 우표를 함께 사서 쓰게 되거나 (프렌즈의 ‘피비’ 처럼), 오늘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낱낱이 이야기할 사람이 곁에 있게 되는 (섹스 앤더 시티, ‘캐리’ 처럼) 등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만큼 헤어지는 데에도 법적인 절차를 치루어야 하고, 관계에 대해서 보다 사회적인 책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2010년까지 28만 명 정도의 커플이 이에 등록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는데, 이에 대해 동성애자들은 “잘된 일이지만, 당연한 일이다. 어쨌든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반응하고 있다.

엊그제 영국의 아카데미시상식(BAFTA) 에서 주요 부문을 휩쓴 <브로크백 마운틴>의 영국 내 성공은, 영국내의 동성애자의 수나, 그들의 ‘적극 후원’하는 친구들, 그리고 ‘섹슈얼리티는 개인문제’라고 말하는 공평한 관객들의 분위기로 볼 때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영화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흐르는 강물처럼>에 필적하는, 화면을 채우는 빛나는 초록색과, 예쁜 두 남자배우의 오금저린 사랑이야기, 몇 세대를 걸쳐 보여주는 사랑의 서사시가 로미오와 줄리엣 버금간다 하는 것이 놀랍지 않을 만큼, 멋지고 감동적인 영화인 것이 당연하다.

이런 ‘당연’ 분위기 속에서, 왜 나는 <브로크백 마운틴>이 당연하지 않은 것일까.

히스 레저가 열연하는 에니스의 속 터지게 안타까운 마음도 알겠고, 영화사가 망해가는 위기를 감내하며 이정도의 완성도를 일궈낸 이안 감독 역시 박수쳐주고 싶고, 가보지도 않은 땅과 시대에 대한 애증의 감정이 드는 것도 이 영화의 힘인 것은 분명한데, “흑흑. 안타깝고 아름다와요”로 끝나지 않는 나의 ‘당연함에 대한 물음표’는 실은, ‘영화와 영화바깥’, 혹은, ‘브로크백 마운틴의 안과 그 바깥’에 있는 것 같다.

영화는 브로크백 마운틴 안에서 출발한다.

나도 너도 속하지 않은 곳에서, 우리는 책의 첫 장을 펼친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는 새출발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몰랐던 새로운 길을 만날지도 모르는데. 그 모험과 기대가 겁도 없이 시작된 곳. 그곳은 ‘아메리카’이며, 그곳은 ‘브로크백 마운틴’이다. 달리 배운 것도, 꿈도 없고, 그저 평범하게 살겠다는 에니스에게, 나름대로 로데오의 꿈도 있고, 싫다 좋다 할 줄 아는 잭은 입속에 넣으면 형체도 없이 사라져 혀끝에 단맛만 남기는 커다란 솜사탕이다. 브로크백에서 떠날 때가 되자, 심통이 난 채로 산등성이에 혼자 앉아 있는 에니스. 거칠어진 마음으로 몸싸움을 벌이고 산에서 내려와 솜사탕은, 딱딱하고 쓴 어떤 덩어리가 되어 벽을 붙잡고 토할듯이 밀어내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아픔이 된다.

산 밖에는, 머저리 같은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 남자는 축구를 봐야 하며, 결혼을 하면 애는 낳아야 하고, 애를 낳으면 돈은 벌어야 하고, 돈을 벌면 체통을 지키기 위해 고집불통이 되버리는. 그 안과 바깥이 처음으로 교차되는 지점, 잭이 4년 만에 에니스를 찾아와 부둥켜 안았을 때, 너도 나만큼 보고 싶었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을 때, 에니스가 알고 있는 다른 옵션이 있었다면. 잭의 말대로, 어디 조그만데 오두막도 얻고, 양도 치고, 농장도 하면서 행복하게 잘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아름다움은, 그런 옵션은 꿈도 꿀 수 없는 비극적인 배경에 기초한다. 영화가 시간을 점프하며 젊은 청년들의 풋풋함이 배나온 아저씨들의 좌절이 될 때까지 은근한 방법으로 비극을 보여준다. 말수도 별로 없는 에니스가 “넌 그럴 때 없어? 술집에 들어갔는데, 저놈이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을 때. 저 놈 뿐 아니라 남들도 다 알고 있는 것 같을 때.” 라고 고백한다. (솔직히 이 부분에서 나는 가슴이 너무 아파왔다.) 어린 시절 본 호모의 최후와, 가족을 버릴 수 없다는 책임감과, 이 시대는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그것은, 잭이 자신의 상상 속에서처럼 맞아 죽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마침내 대면한다. 에니스의 말대로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 있다가, 자신만의 시간과 장소로 떠난 그에게, 브로크백 마운틴은 도망간 곳이 아닌, 간직한 곳으로 변화한다.

(히스레저의 아내로 출연하는 미첼 윌리엄스 (실제로는 영화찍다 눈이 맞아 딸아이를 낳았다.) 는 왕년에 종종 레즈비언 영화에 나와주셨었다. 두번봐도 재밌고 세번봐도 재밌는 <하지만 나는 치어리더인걸> 에서도 등장하고, <더 월2>의 두번째 에피소드에도 출연한다. <더 월2>는 세 시대를 거쳐서, 레즈비언들을 그리고 있는 영화인데, 적어도 미국내 레즈비언성장기로는 꽤 재밌는 영화다. 그 영화의 첫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60년대 할머니 커플들과 함께 시절을 보낸 것이 잭과 에니스다.

잭과 에니스는 섹스는 하지만, 함께 삶을 나누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레즈비언 할머니 커플들은 삶은 나누지만 섹스는 하지 않는다. (물론 하겠지만, 영화안에서 그것들은 보여지지 않는다. <죽어도 좋아>를 끝까지 보기가 어려운 이유와 일맥상통하는 터부일까. 혹은 정당한 레즈비언 섹스는 덜 섹시할 것이라는 어불성설일까.)

어쨌든 아프기는 매한가지다.

미망인 할머니는 죽은 애인의 물건들을 먼친척들로부터 빼앗기고, 에니스는 잭의 집에 가서 옷장뒤에 숨겨놓은 한때 브로크백 마운틴을 박차고 싸우며 굴렀던 피묻은 셔츠를 가져올 수 있게 된다.

60년대의 호모는 고추가 꽁꽁 묶인채 끌려다니다 죽임을 당하고, 혹은 아무런 법적인 보호도 없이 파트너를 떠내보내야 했었다는 이 비극이, 나에게는 현실처럼 느껴지는 이 이상한 시대혼란은, ‘그랬었었더라’ 라고만 묻어버릴 수 없는 갈등을 만들어 낸다. )

아픔과 비극은 어디에나 산재한다. 그런데, 그 비극의 원인이 사회나 구조에 있을 때, 영화바깥에 존재하는 현실을 상기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호평 이면에는, ‘동성애를 뛰어넘는 사랑이야기’라는 이상한 탈출구가 있다.

감독은 이영화가 ‘게이 웨스턴’이 아니라고 부인하며, 영화관계자들은 ‘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약속한 것 같다. 예고편에는 잭과 에니스의 섹스 장면 대신, 각자의 부인과의 섹스장면이 나온다. 헤테로 관객들을 소외시키지 않겠다는 전략이다. ‘이것은 게이 영화가 아니다. 사랑영화이다’ 라는 표현에서 영화바깥을 둘러싼 포비아는 폭발한다. 미국 유타주와 중국에서는 영화상영이 금지되었고, 보수언론에서는 영화를 폄하했다는 증거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말이다.

한편, ‘게이’는 한국에서도 더 이상, 외국어가 아닌 것처럼도 느껴진다. 이제 이 정도의 소재는 충분히 성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판단아래서 15세 관람등급가가 된 것 아닌가. 우리에게는 <왕의 남자>도 있고, <번지점프를 하다>도 있으며 <로드무비>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아직도 동반자임을 사회적으로 허용받기는커녕, 동성애자들의 존재는 늘 어두운 곳에서 실패자 혹은 범죄자로 미디어에 등장하는 걸까. 왜 공평한 방식의 성교육은 이루어지기 어렵고, 퀴어 축제는 환영받기 어려운 걸까. 영화를 받아들이는 취향과 사회적인 남을 받아들이는 관용은 일치하기 어려운 걸까. 어쩌면 그것은 미에 대한 예찬이 혐오증을 넘어서기 때문이 아닐까. 야오이 만화에 꽃미남이 나와야지, 느닷없이 뚱녀 둘이 나왔다간 ‘엽기갤러리’쯤으로 옮겨 갈 것이다.

그것은 한국이고 영국이고 미국이고 별나라고간에, 이미 확장된 권력들이 가지는 특권일지도 모른다. 예쁜 오빠들은 그 권력에 자연스럽게 초대되고, 그 기준은 글로벌적 설득력을 가지는 ‘가슴 아픈 사랑’인 것이다. 아직도 나는, 이 영화가 본격적인 게이물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이 아쉽고, 이들의 사랑을 일반화하여 아름답게 보자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다. 두 나무의 웅장한 풍채에는 감탄하겠지만, 숲과 산 앞에서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분위기다.

남성동성애소재는 이제 팔리는 문화 산업의 한 코드다. 그래서 작가도, 감독도, 배우도 동성애자가 아닌데도, <브로크백마운틴>과 같은 영화가 나올 수 있는 것 아닐까. (남성동성애 소재가 팔리는 것도 팔리는 것이지만, 남성동성애 문화창조자들의 메인스트림 진출또한 간과할 수 없는 코드가 된 것 같다. <섹스 앤더 시티> 랄지, <위기의 주부들>, 하물며 <디 아워스>의 작가역시 게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언니들은 전부 showtime 랄라라짜로 시작되는 드라마에 전념하는 것인지, 도통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와중에 새책을 내고 이목을 한몸에 받고 계시는 사라 워터스의 의 행보가 새삼 기대가 된다. )

네가 너여도 상관없고, 내가 나여도 상관없는, 이방인과 외국인과 남과 그들과 함께 생존하는 방법. 그것은 “너도 나와 다르지 않다”라는 위로나 연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브로크백 마운틴’ 안에서 공존하는 것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영화 안에서도 그림처럼 묘사되는 것 또한, 그런 이상적인 상상의 공간을 제시하고 싶었던 바람은 아니었을까, 그래도 희망을 걸어본다.

ps1. 잡지에 쓴글이라, 할말을 다 못한듯하여, 괄호를 쳐서 자방에 다시 올린다.. 괄호를 막 넣었더니 앞뒤가 안맞는 우스꽝스러운 글이 되어 버렸다. ㅜ.ㅜ

사실 ‘게이영화지만, 희망을 걸어본다’ 로 끝날 것이 아니라, ‘언니들이여! 우리도 사랑의 대서사시 만들어요!’ 라고 하고 싶다. 어쨌든, 요약하자면, 영화는 좋았으나, 완전 좋지는 않았으며, 완전 좋지 않았던 이유는, 심술과 질투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 게이 영화에서 여성이 소비되는 방식은 여전히, ‘게이임을 깨달아가는 과정’ 속에 가정에 매몰되고, 불편한 섹스를 해야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레즈비언 영화에서 남자가 ‘저쪽 나라의 나와 관련없는 사람’인데에 비해, 게이 영화에서 여성은 한번은 밟고 지나가야 할 존재인 것만 같다.

ps2.
시네의 남동철 편집장은, 브로크백마운틴을 아담과 이브의 신화에 비유했던데, 말도 안되는 소리다. 무슨 동성애가 선악과따먹는 건줄 아나. -.- 낙원은 좋으나, 신화는 씨알도 안먹히는 얘기다. 그럼 양떼주인은 하나님이란 말인가!

ps3.
불안과 공포, 체념과 비극을 뛰어넘어 끝까지 사랑하는 것은 어쨌거나 대단한 일이다. 4년만에 한번씩 만나도, 수개월만에 한번씩 엽서가 와도 그때처럼 쿵쾅쿵쾅 뛰어서 코가 뿌러질만큼 성급하고 격정적으로 다가가 키스할 수 있는 것은, 너외에는 인생의 의미가 없어야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 태이, 스크린 2006년 3월호 (탈고전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