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라는 무지개 구슬 – 비디오미술의 삐삐롱스타킹, 삐삐로티 리스트
내년에는, 바뀔꺼야. 맥주도 조금만 마시고. 다 다시 시작해야지. 책도 좀 읽고, 뉴스에도 귀기울여야지. 요리하는 법도 배우고, 신발에 돈좀 적게 써야지. 제때제때 방값도 내고, 우편물도 매일매일 정리해야지. 와인은 좋은 것만 마시고, 일요일마다 할머니에게 전화도 해야지. 새해결심, 다짐하고 또 사라지지만. 이번엔 이중에 하나라도 잘 지킬 수 있을까? 대답은 아마도.. ‘아니’. 그래도 그중 한가지만 꼭 해야 한다면, 나의 커다란 두려움들에도 불구하고, 너에게 이것만은 말해야 한다는 것. 몇년동안이나 너에게 느꼈던 것. 내년에는! 내년에는! 내년에는 내 마음을 꼭 너에게 말해야지.
Jamie callum 의 next year.
BGM 없는 런던은, 비네가 없는 피쉬앤칩스, 신고추 없는 케밥, 오뎅없는 떡볶이, 우유없는 고구마. 점심을 먹자마자 어둑어둑 하루가 저무는 런던에도 새희망과 함께 느릿느릿 겨울이 가슴팍에 다가왔다. 지난 11월 말 두번째 앨범을 내놓고 이번겨울 제법 타이트한 유럽도시 투어를 돌고 있는 21세기 헤리코닉 쥬니어 업그레이드 영국판, 제이미 칼럼의 새해다짐이 마치 내 마음 속, 다짐 같아서 웃음이 난다. 날씨는 쌀캉하고 마음은 날카로운 때, 보름달은 또 뜰 것이라고 생각하고, 새해는 음력으로 쇠어야지 생각하며 새해맞이 살빼기 일정은 일단 한달 뒤로 미뤄두고 겨울에 영국을 찾아온 애인명단을 뒤적뒤적하였다.
제이미 칼럼의 next year 의 꼭 지키고 싶은 약속처럼, 나에게도 기회가 있으면 마음을 고백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가 얼마전 피카딜리에서 전시를 하였다. 그간 오랜 아프리카 출장으로 심신이 지쳐있었지만, 그의 전시라면 기어서라도 가봐야 겠기에, 크리스마스 세일인파를 양손으로 헤쳐가며 찾아간 곳은, HAUSER & WIRTH 갤러리. 무거운 커튼을 열어젖히니 그는 용감하고 무식하게도 나를 곧바로 침대로 안내하는 것이 아닌가.
다소 부끄러웠지만 그의 초대에 순종적으로 응하며 나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천정에서 눈위로 쏟아지는 이브의 정원의 나무와 이브의 빨간 머리, 그리고 터널 천장에 씌여지는 손글씨와 낙엽이 굴러가는 대로 렌즈를 들이댄 누군가의 카메라. 커다란 트롬 세탁기처럼 하얀 배경에 동그란 내부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빅토리안식 건물내부는 바닥과 벽은 오래된 나무로, 천정은 화려한 조각으로 되어 있었는데, 내가 누워 있는 침대가 공간을 쭈욱 둘러서 놓여있고, 천장과 마주보는 바닥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 천장의 아래에서 천정의 트롬세탁기 투명부분과 크기가 같은 동그란 프로젝터 홀더는, 바닥 거울에는 전체화면을, 빅토리안 천장의 샹들리에가 원래 있었을법한 동그란 가운데 부분에는 동그란 화면을 쏘아올리고 있었다.
나무로 기어 올라갔다가 다시금 천천히 내려오며, 이브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저것은, 올해 비엔날레에서도 San Stae 교회에서 선보인 작업. 어쩐지 야하고도 조용히 규칙을 깨어나가는 이 화면의 주인은 내 스무살적 감수성 중심에서 나를 유럽으로 강하게 끌어당긴 자석같은 여자 삐삐로티 리스트다.
그의 이름을 듣고 삐삐롱스타킹을 떠올렸다면, 그의 비디오를 보고 이 재기발랄함과 발광하는 오렌지빛 수퍼프레임들이 80년대 싱글채널 비디오 미술에서는 꽤나 삐삐롱스타킹만큼 파격적이지만 사랑스러운 스타일로 자리굳힘했음이 놀랍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본명은 샬롯이었으나 이후 가족들이 별명으로 부른 삐삐롱스타킹에서 삐삐로티가 되었으니, 아마도 이언니는 어렸을때부터 싹수가 달랐음이 틀림없다.
그래픽 디자인과 사진을 공부한 그가 처음 순수미술의 우아스러운 씨름판에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따돌림 받은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누가 미술은 미술가의 자식만, 미술대학교에서만, 상아탑에서만, 불타는 영혼에서만 꽃핀다 하였는가. 미술은 자갈치시장 뒷골목에서도, 성냥갑 아파트 구석진 골방에서도, 책장에 끼워둔 어린이 명작동화 전집 제 15권 귀퉁이에서도, 부끄러운 사람들의 일탈이 우글대는 거리에서도, 어디에서든지 깨어나올 수 있는 것이라 믿고 싶다. 뭐 그렇다고, 나의 비디오 첫사랑 삐삐로티 리스트가 자갈치 시장에서 문어를 머리에 얹고 엄마몰래 해적음반을 사모은 80년대 예술하는 언니라는 것은 아니다. 그도, 스위스 한복판의 났다는 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고, 팝음악을 좋아해, 학교때는 콘서트장 디자인도 맡아서 하고, 밴드에서도 8년간이나 몸담았다고 하니, 실은 오늘날의 삐삐로티의 감각적인 스타일이 하루아침에 나온 것은 아닌, 혜택받은 동시대 예술가임에는 틀림없다. MTV 1세대 아줌마 삐삐로티 리스트. (1962년생) 정보시대의 예술가는 느낌을 말하고,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중간자라고 말하는 그의 비디오는 사실 매우 정치적이고 급진적이다.
전시장 1층에서 누운 채로 그의 2005년도판 러브레터를 보고 나서 지하로 내려가니, 그 정치적이고 급진적인 작업들 중에 가장 유쾌한 ‘Ever Is Over All’ 이 냉동고 같은 창고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하늘하늘 예쁜 치마를 입은 한 언니가 코스모폴리탄의 도시거리들을 누비며, 자동차 유리창을 다 깨부수며 춤을 추는 이 파격적인 비디오의 결정적 묘미는, 그 광경을 응원하듯 웃어주며 지나가는 경찰관 언니의 표정에 있다.

뮤직비디오의 감각적인 화면들을 사랑하고, 팝음악과 팝컬쳐에 심취해있었던 스위스 부잣집 막내딸 같은 삐삐로티 리스트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를 다극다극 갈며 사회적인 여성문제를 이야기하는 80년대를 뚫고 지나온 한국의 여성주의자 언니들에게 어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유쾌한 반전과 대중적인 반찬에 예술적인 양념을 첨가한 시고 시원한 동치미 같은 영상미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답게도 그의 홈페이지에 가보면, 그가 연장선상에 서있는 미디어의 흐름에 그는 앞서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2001년에 문을 연 그의 소박하나 있을 것은 다 갖춘 사이버홈에 집들이를 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제 그도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현대미술의 한복판에 선 사람으로서, 이전에 보여주었던 활활 타는 나홀로 퍼포먼스 비디오의 오르가즘을 보여주기 보다는, 자연과 한데 어우러진 세련된 페퍼민타의 여정을 보여주며, ‘내 침대로 어여 와서 누우시지요’ 라고 말하는 능글맞은 작가가 되었지만, 그의 런던나들이가 그래도 반갑다.
추운 비바람을 가르며 피카딜리를 지나 트라팔가 광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12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아웅다웅 영국가요 순위권을 다투고 있는 오아시스와 블러의 신세기 버전 고릴라의 음악이 들려온다. 런던도 서울도, 제이미 칼럼도 오아시스도, 삐삐로티 리스트도 그리고 나도 동시대에 살고 있는 하나의 무지개 구슬일 뿐인걸. 검은 하늘에 세탁기가 열리면서 갖가지 동시대의 무지개 구슬들이 와르르르 쏟아지는 것만 같다.
/스크린 1월호/
사진 캡션 및 카피라이트
pipi01.jpg 이번 전시의 포스터 (HAUSER & WIRTH 전시장 홈페이지
http://www.ghw.ch/tunnel.php
pipi02-13.jpg 전시내부 사진 – 타원형 프로젝터의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