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mo Levi, Poems
고통의 나날들
-까마귀의 노래․2
그대가 버텨온 날들은 얼마나 되는가?
나는 하나씩 세어보았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왔던 고난의 세월들
아무도 막을 수 없었던 어둠의 나날들
서서히 밝아오는 새벽에 대한 공포감들
그대를 기다리는 내 기다림에 대한 불안감들
세상 끝까지 그대를 따라가 도망칠 필요도 없는
내 두려움의 나날들
그대의 말 위에 앉아
그대의 배가 지나는 다리에 오물을 남기고
내 검은 그림자로 그대의 탁자에 앉아
그대가 숨는 피신지마다 나타나는 나치처럼
혹은 그대와 늘 함께하는 영원한 동지들처럼
나는 항상 그대를 지켜보고 있었네.
비록 그대의 꿈들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가을낙엽이 떨어지고 시계가 멈추더라도
그대의 몸이 쇠락하고 삶의 마감이 오더라도
그대의 세상마저 저물어 새벽이 오지 않더라도
난 옆에서 항상 그대를 지켜보고 있겠네.
데릴라
반역자이면서 산을 파괴하는 유태인 청년
그 이스라엘의 삼손은 내 섬세한 손끝에서
도자기를 빚는 찰흙처럼 부드러웠다.
신비한 그의 괴력을 없애는 것은
아이들의 놀이처럼 의외로 간단했다.
나는 온갖 칭찬과 감언이설로 그를 꼬드겨
내 무릎에 잠재운 다음 머리카락을 잘라
황소 같은 괴력과 시력을 파괴해버렸다.
내 분노가 환희로 변한 것도
그의 몸이 내 몸을 취하던 때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쇠사슬에 묶인 그를 본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 인생에서 그때보다 더 기뻤던 적은 없었다.
이제 삼손이 자신의 운명을 마주하게 하자.
그것 외에 내가 신경 쓸 건 전혀 없다.
글쓰기 작업
드디어 원고작업이 끝났다.
내 손의 펜이 너무 무겁다!
조금 전에는 수은처럼 너무나 가벼웠다.
난 그저 펜이 가는 대로 쓸 뿐이었다.
펜은 정상인이 맹인을 안내하듯
아름다운 여인이 당신을 춤으로 유혹하듯
나의 손을 이끌어 주었다.
그래서 원고작업은 만족스럽게 끝났다.
만약 어느 단어 하나만 빼더라도
잉크가 샐 정도로 문장에 구멍이 날 테고
어느 단어 하나를 더 추가해버린다면
불협화음처럼 조화가 왕창 깨어질 테지.
물론 한 문장이라도 바꾸면 전체 분위기 역시
개들이 짖는 콘서트처럼 확 바뀌겠지.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작품과 자기 자신을 분리시킬 것인가?
작품이 끝날 때마다 나는 한 번씩 죽는다.
먼지의 세계
한 생명의 신경세포 위에 얼마나 많은 먼지들이 쌓일까?
먼지는 소리와 빛깔이 없으며 무게와 존재 목적도 없다.
그것은 가리고, 지우고, 사라지고, 숨고, 마비시킨다.
그리고 죽지 않고 단지 잠든 척하며 소멸할 뿐이다.
먼지는 미래를 위협할 수많은 씨앗들을 품고 있다.
찢어지고, 분해되고, 부서지기를 기다리는 작은 번데기들
항상 파시즘의 공격에 대비해 은밀한 매복을 되풀이한다.
하지만 이 호기심 많은 도발적인 먼지들은
우주적 발상으로 충만한 여러 씨앗들을 잉태하고 있다.
그러니,
이 무형의 회색 먼지들을 높이 경외하고 두려워하라.
게다가 그 안에는 선과 악, 위험한 언어들의 세계까지
도사리고 있지 않는가.
생채기
나만 아는 쉽게 갈 수 없는 깊은 계곡이 있다.
입구에는 낭떠러지와 덤불과 물살 센 여울이 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희미한 흔적밖에 없다.
지도에도 없어 나 혼자서 그 길을 겨우 찾아냈다.
몇 년이 걸렸으나 시간 낭비는 아니었다.
혹 나보다 누가 먼저 그곳에 갔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깊은 계곡의 바위에는 신비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그린 것들도 있다.
바위 아래에는 너도밤나무와 자작나무들이 울창하고
위쪽으로는 낙엽송과 전나무들이 띄엄띄엄 서 있다.
또 그 위에는 차갑고 깊은 청정호수도 있다.
지대가 높아질수록 나무들이 자라기 어렵지만
길옆에는 늘 푸른 나무들이 옹골차게 자라고 있다.
하지만 그 나무이름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아마 창세기에나 나올 법한 나무들일지도 모른다.
또 신기하게도 계절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심지어 한겨울의 눈보라로 뒤덮여도 꽃이 핀다.
그런데 어느 날 나무밑둥을 자세히 보니
바위의 벽화처럼 묵은 생채기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