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새끼들 All Cubs in the World
“I wonder if we always turn into our parents.”“I like to think of it as where my parents left off.”
영화 Broken English (2007) 에서 새로 만난 어색한 두 남녀가 극장에서 하는 말.
한사람이 ‘우리가 크면서 우리의 부모님처럼 되는 게 아닐까’ 라고 하니, 다른 한사람이, ‘부모가 남기고 떠난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게 아닌가 해’ 라고 한다. Left Off 라는 표현은, ‘이제 그만두고 떠났다’, ‘어떤 임무를 다 끝내지 못했다’, 혹은 ‘무엇인가 더 이어갈 것이 있다’ 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새로 인계받은 직책을 맡으며, ‘I will start where she left off’ 라고 하면, 그 전 사람이 남겨놓은 어떤 것을 이어서 하겠다, 는 말이다. Left Off 에는 그렇게 완결되지 못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또, 떠나버렸다는 미스테리를 숨기고 있다. 한편 “Leave off!” 라고 하면 다소 거칠게 ‘그만둬!’ 라고 하는 말이다. 영국에서도 이제 거의 쓰지 않는 말이니 미국에서는 쓰지 않을 것이다. ‘pick up where the parents left off’. 우리는 부모가 남긴 어떤 지점으로부터 발전하고 있는걸까? 부모가 남긴 것은, 물질적인 것을 제외하고 어떤 방식으로 전해진 걸까.
부모세대가 죽고, 자식세대가 그 뒤를 이어가며 조금씩 일진보 해온 것이 인류의 역사이다. 부모들이 극성맞게 자식들의 교육에 힘쓰는데는, 부모가 다 못한 꿈을 너는 이루거라 – 하는 희망사항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내 아이에겐, 좋은 점을 물려주고 싶고, 부모세대가 범한 과오는 저지르지 않도록 충고를 해주고 싶은 것이 당연한 일이다. 요새들어 그것을 부쩍 온몸으로 실감한다. 시간이 가면서, 세대의 변화를 목격하게 되고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것이 현재라는 당연한 이치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또, 부쩍 주변 사람들이 아이를 낳아 기르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페이스북에 아기들의 사진이 부쩍 많아졌다. 또 아이들과 더불어 부모들, 즉 나의 친구들의 일상도 새로운 장을 열어간다.
준비했든 하지 않았든, 일상의 한복판에 들어온 세상의 모든 새끼들. 그중에선 사람의 아이도 있고, 강아지도 있고 아기 고양이도 있다. 아이들은 이제 막 세상을 접하기 시작했고, 호기심이 많고, 눈이 맑고, 눈 코 입에서 액체를 흘리고, 활달하고 행복하다. 아이를 기른 부모들은, 그렇지 않은 친구들과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어른의 모습이 된다. 그건 꼭 나쁘지 많은 않다. 부모가 된 친구들은, 유독 남의 밥 때도 잘 챙기고, 피곤한지 안한지, 얼굴도 살피며, 어딘가 자애로운, 그러나 피곤한 얼굴로 나를 반긴다.
또 한편으로는, 부모가 되지 않기로 결심하거나 아직 때가 오지 않은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휴가땐 놓치지 않고 여행을 가고, 친구들을 모아 근사한 저녁식탁도 차리고, 반려동물과 함께 일상을 함께 하며 자신의 생각이나 고독, 혹은 일과 사랑에 골몰한다. 그들도 누군가의 삼촌이거나 이모이기 때문에, 부모가 되는 과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피곤한 일을, 왜 사서 해야 하나 조금 시니컬할 뿐이다. 생활을 함께한다는 점에서, 반려동물과 아이들은 비슷하지만, 반려동물들은 아이들만큼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냥 ‘존재함’으로 위안이 되기 때문에 그 둘은 다른 존재들이다. 간혹 우주와 소통하고 있는 것만 같은 반려동물들과의 관계는 우정이고 정이다. 그들을 parenting 할 필요는 없다. 그들과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peer-enting 일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들이란, 얼마나 귀찮고 짜증나는 존재인가. 그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고, 논리나 이유가 통하지 않는다. 일방적이고 무방비적인 그들의 상태에, 무조건 적으로 봉사해야 한다. 그러다 그 작은 생명체와 사랑에 빠지기라도 하면, 그 이후엔 또 얼마나 무조건적으로 헌신하게 되는가! 버릇없는 아이들, 울고 난리치는 아이들은 공공장소에서 얼마나 성가신가. 떼쓰고 말안듣고, 집어던지고, 두려움이 없는 유아기는 그야말로 폭군이 따로 없다. 그래서, 엄마의 입장에서 생각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엄마들 뿐이다.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유모차를 선뜻 옮길 수 있도록 허리를 숙여 도와주는 사람은 대부분 엄마들. 차안에서 울어 제치는 아이와 엄마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도 역시 다른 엄마들.
고백하건데, 나는 누군가의 아이를 들고 있다가 똥이라도 싸면, 이걸 치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늘 부담스러웠다. 잠깐만 안고 있으라고 하는데도, 어떻게 들고 있어야 할지 잘 모르겠고, 내게 왜 이런걸 시키나 의뭉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아이를 낳음으로서 커리어를 버리고 집안에 매몰되는 엄마들이 어쩐지 불쌍하게 느껴졌으며, 아이사랑에 지나친 엄마들은 과도하게 보였다. 이내 자기 이름은 집어던지고, 누구엄마로 불리는 엄마들의 잃어버린 정체성에 대해서 은근히 엄마에게 그 책임을 물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 지점, 새끼가 있느냐 없느냐는 여자들 사이의 관계를 한층 더 갈라놓지 않을까? 이별에 마음이 아픈 싱글친구는, 모유수유하고 있는 친구를 술자리에 불러내지 않을 것이다. 하루종일 아이들과 전쟁을 치루고 녹초가 된 엄마가, 세상의 트렌드를 뒤쫓을 겨를은 또 얼마나 있겠느냐. 이런게 자연스럽게, 새끼를 같이 만든 아빠들의 문제가 되기도 하고, 옆에서 지지하고 응원해준, 가족과 친구들의 문제가 된다면 더없이 행복하겠지만, 대부분은 당사자, 엄마만의 문제다. 엄마라는 사회적인 존재는 바깥으로 나와 그 존재를 드러낼 때, 강철처럼 강인하다, 혹은 강인해야만 하는 모성신화에 갇힌다. 아이 셋을 들쳐없고, 대형 갤러리의 미술 설치를 해냈다는 작가, 저녁때면 아이 열명을 줄세워서 산책을 나오는 옆동네의 임신한 유태인 엄마, 박사공부를 하며 그 사이에 아이 둘을 낳고, 둘째 애 돌 때 귀국했다는 교수님, 정자를 페덱스로 배송받아 임신에 성공하여 백인아들을 낳은 흑인언니, 혼자서 폭력남편을 떠나 아이 둘을 키우고 일까지 시작했다는 싱글맘. 오십대에 아이를 낳아 키우는 레즈비언 커플, 뭐, 슈퍼엄마의 이야기는 내 주변만 해도 끝도 없다.
그들에게 아이를 낳아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대답은, (친한 사람들이라면) ‘안행복하면 어쩌겠어. 그냥 사는 거지. 하지만 이제 내새끼가 없다는 상상은 할수가 없어’ 라고 말한다. 이 체념섞인 말, 그러나 아이의 존재를 완전히 받아들인 이 말은, 그야말로 겪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말이리라.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이가 주는 행복감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일축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 간극은 좁혀지지 않는걸까. 왜 엄마들은, 집에 갇혀 내가 다른 젊은 여자들에게 뒤떨어져 있는건 아닐까 고심하게 되고, 엄마가 아닌 사람들은 내가 여자로서 할일을 다 못하고 죽는건 아닌가 하고 걱정할까. 이건 본능과 관계 하는 일일까, 아니면 개인의 과제인가.
흔히들, 엄마들이 설명을 축약하고, ‘너도 낳아봐 그러면 알게돼’ 로 대신하는 경험자의 위엄이란 새끼를 낳아 길러보지 않은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세계가 있음을 뜻한다. 출산과 육아를 전담하고 있는 ‘엄마’의 신화는 이어진다. 철두철미하게 사회적 약자의 모습을 내던지며, 포스를 내뿜는, 에이섹슈얼한 아줌마 군단의 슬로우 모션을 상상해보라.. 반면 아빠의 존재가 육아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아직도 출산과 육아는, 엄마의 몫인 것이다. 애초에 낳기는 남자가 낳고, 모유는 여자가 준다던가, 역할이 반반씩 떨어져 있으면 좋으련만. 남극의 펭귄들처럼.
어쨌든, 동물이건 사람이건, 새끼를 보살피고 기르는 것은 중대한 일이다. 나의 생명이 아니므로 내맘대로 할수는 없고, 그의 존재가 독립적으로 혼자 먹고 살 수는 없으므로 전적으로 내게 의존하는 관계. 이것은 그와 나와의 신의라기 보다는 나 혼자만의 약속이다. 내가 약속을 지키기로 한다고 그에게 맹세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가 얼마나 내 생활을 포기하면서 그를 보살피고 죽지 않도록, 생명을 이어 자랄 수 있도록 하는지 그는 깨닫지 못한다. 이 연약하고 이기적인 존재. 세상의 모든 새끼들은, 그를 낳은 엄마, 혹은 그를 선택한 사람만의 책임인가.
나는 부모가 아니므로, ‘엄마의 사회적 존재’에 대해서 이런 화제에 대해 망설여왔음을 고백하고 싶다. 그나마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아마도 낙태를 경험하고 난 이후였던 것 같다. 당시의 나에겐, 혼자서 걸머지고 갈 일임이 너무나 확연했고, 문득 우주에 나혼자 뚝 떨어져 나보다 더 생존에 연약한 누군가를 돌봐야 한다는 것 자체가 끔찍했다. 그 때 누군가, 나의 입장에서, 자꾸 아이라고 생각해서 죄책감을 키우지 말고, 뭉쳐진 피라고 여기고 결정하라 충고해 주었다. 여튼, 상처는 세월이 지나며 아물었다. 자랑할만한 일은 아니나, 부끄럽게 여기고 싶지도 않다. 많은 여자들이, 이런 경험에 대해서 좀더 솔직하고 가볍게, 혹은 당연하게 얘기를 나누었더라면 지나가는 감기처럼 별 것 아닌 일일텐데. 평소엔 누구나 비밀로 간직하는 일이라, 그 무게가 더 크게 느껴졌었던 것 같다.
여튼, 나는 엄마가 아니다. 나는 엄마의 친구이며, 잘해봐야 어리숙한 이모 정도이다. 그것도 말이 좋아 이모이지, 피도 나누지 않은 일년에 몇번 볼까말까한 허당이모. 그러나 나는 어느날 엄마가 되면, 아이없는 싱글 친구들에게 도움을 쉽게 요청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아이는 내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겠지.. 이 ‘돌보는 아이가 없음’ 에서 ‘나는 아이가 있음’으로 건너가는 통로의 상황을 절단해서 보자. 결론은 이러하다. 이것은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혼자서 외친다고 될 일도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나의 생각을 정리해보면.
1. 새끼들 (그것이 아이이든, 동물이든)을 키우는 것은 공동체의 몫이다.
2. 공동체는 엄마를 포함하여 적어도 2인, 크게는 5인은 있어야 한다.
3. 공동체는 피를 나눈 혈육이 아닐 수록 좋다.
4. 공동체는 새끼를 낳던, 입양을 하던, 그 결정에 공동으로 참여해야 한다.
5. 새끼는 그 공동체에 피해를 입히는 존재여선 안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공동체가 충분히 새끼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없는 것이 낫다.
6. 공동체는 새끼의 1차적인 책임을 지는 사람, 엄마의 안녕을 같이 고려해줘야 한다.
7. 엄마는 다른 공동체 구성원들이, 아이의 인생에서 소중하고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엄마와 자식,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허울좋은 프레임이다. 제 새끼를 낳아야 하고, 새끼가 부모 죽을 때까지 보살피고 돌보는 것은 이미 이시대에 걸맞지 않은 책임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아버지는 신문보고 어머니는 과일깎고, 아들하나 딸하나가 뛰어노는 가족의 모습은 ‘엄마만의 새끼낳기/키우기’를 깰 때 적극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따뜻한 집과 편안한 의자, 아플 때 서로 위로해주고, 기쁠 때 함께 웃어주는 가정의 모습은, 가족으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정에 어른이 아닌, 유약한 살아있는 존재를 키운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또, 그 아이가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도 축복 받은 일이다. 나처럼 별로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이를 키우는 것이 부모 외의 사람들에게도 책임이라는 말에 크게 반대할 것이다. 여성에게 짐지워진 모성신화의 허구에서 벗어나는 것도 여성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아이가 싫어서이기도 하고, 결혼, 출산, 육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삶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에 관계하는 일이 싫기 때문일 것이다. 인정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런 부모 – 자식 / 가족의 이상향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사회적인 권력구조, 정상적인 삶이라는 착각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이를 낳는 것이 국력을 키우는 일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거겠지..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 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삶이 세대를 거쳐서 점점 나아지고 있을까? 부모들이 남겨놓은 어떤 지점으로부터 우리는 다시 바통을 찾아 마라톤을 뛰는 것이 아니다. 새로 태어날 때마다, 새롭게 다시 뛰는 것이다. 부모가 남겨둔 자산보다는, 부모가 남긴 빚이 더 많은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것이 엄마라는 노동자들이 자식을 내팽겨두고 궐기할 수 없는 싸움판에 홀로 서있게 할 수 없는 이유이다.
ps 이 글 앞의 사진은, 나의 친한 친구 클리얼리와 그녀의 파트너, 그리고 그들의 아이 지아가 두살이었을 때, 찍어준 사진이다. 지금 지아는 다섯살이고 학교에 들어갔다. 이 50대의 레즈비언커플은 아이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지아가 태어났을 때 주변 사람들 모두가 진심으로 기뻐했다. 관계는 언제나 변화하는 법. 지금 그들은 헤어지려 한다. 지아가 엄마대신 이모와의 대화가 필요할 때, 난 거기 있을 것이다.
* More Reading;
모성신화, 그 불편함에 대하여, 연효숙 [시대와 철학] 2007.
새로 쓰는 ‘모성신화’, 김영옥 [여성학논집] 2005.
Kawashima Kotori, Photographer
ps 2 사진작가 가와시마 고토리의 미라이짱. 아이의 와일드함, 외로움, 용감함, 사악함까지도 잘 담아낸 사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