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 얼굴들 To Faceless Faces
90년대 중반 막 온라인 세계에 들어왔을 때, 누군가를 만나고, 타인의 글을 읽고 생활을 들여다 보고, 새로운 소통의 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나를 무척 설레게 했다. 그때 만났던 필명 서태지, 바람구두, 앨리스, 문지기, 듀나는 지금 다 어디선가 또 다른 글쓰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나우누리에서 만났던 수많은 모임의 회원들, 시삽들은 지금 다 무엇 하고 있을까? 그들은 마침표, 쉼표, 띄어쓰기, [ ] 에 민감하고 세줄짜리 프로필도 매일매일 바꾸는 디테일한 사람들이었다. 색깔없는 모노톤, 그림없는 문자의 세계. 통신 시절의 소통은 그야말로, 말에만 의존해야 했던 단편성에 비하여 참 실하고 재미있었다. 그 때 만났던 많은 친구들과 나는 지금도 만나고 있으며, 그 때 문자 사이에 남겨두었던 감성이 통할 때에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아바타로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프리첼이 성행했는데, 일단 이미지로 자신의 정체를 대체한다는 점에서, 이미 상상력에서 한단계 내려온 셈이었다. 이미지는 중독성이 있고, 시각적인 정보로서 금새 정체성에 대한 판단이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순간, 모두가 사이월드로 흡수가 되었다. 사이월드는 사이버 정체성을 대신하는 아바타 대신, 공간을 디자인하는 ‘내방꾸미기’ 컨셉을 가져왔다. 그런 미니미에 방꾸미기도 당시에 센세이셔널했지만,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자기의 생활을 보여주기 좋은 ‘내 미니홈피’ 가 누구나 하나씩 있었다. 일촌에게 스테레오도 선물하고, 계단도 선물하고, 무지개와 숲도 선물할 수가 있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웹공간 안에서, 사회성을 구축하고 자신의 영역을 훈련할 수 있는 대중적인 툴이 생긴 것이다. 사이월드는 다른 회원들과 일촌을 맺음으로서, 그 관계를 돈독히하고 특별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었다. 이런 사이월드의 관계성, 공간성에 기댄 수익모델에 대해, 해외에 많은 웹컨설턴트들이나, 회사들이 관심을 가졌다. 대학원 시절, 이런 사이월드 문화에 대해서 발표할 기회가 있었는데, 외국인들에게 이해가 안가는 부분은, 왜 방을 꾸미고 싶은가? 왜 그사람과 일촌을 맺어야만 하는가? 일촌을 맺지 않고도 얼마든지 자기 표현을 할 수 있지 않은가였다. 그마만큼, 비밀의 공유가 중요한 한국의 웹과는 대조되는 부분이었다.
여튼, 사이월드때만해도, 나는 내 홈피에 누가 오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일촌네트워크는 처음에는 유용했지만, 곧 불편해졌다. 친구과 나누는 일상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집안얘기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절친한 친구들이 있고, 담배피는 걸 비밀로 하고 있는 친구도 있고, 작업이나 일과 관계되어 정말 미니멀하게 알고 있는 사람, 가족과 얽혀 있어 웬만한 건 다 숨기고 싶은 사람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사람들 분류 폴더를 만들때 쯤, 나는 사이월드와 멀어졌던 것 같다. 그렇게 친구 레벨 분류를 하고 있노라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컴퓨터를 껐다가 괜히 손글씨로 쓴 편지, 믹스 카셋 테이프 같은 것들이 막 그리워졌다.
미국으로 유학을 간 친한 친구가, 자기의 하루는 이러하다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따금씩 일상을 녹음을 해준 테이프. ‘나는 일어나 밥을 먹고 공원을 걸어가고 있어.’ ‘ 공원에서 나와 누군가를 만났어’ ‘내 기분은 지금 이래.’ ‘하늘이 파랗다’ ‘김치찌게 먹고싶다’ 이런 주절주절한 수다들을 녹음해서, 우편으로 보내면 2주 뒤에야, 그 테이프를 들으면서 혼자 낄낄 거리곤, 이렇게라도 함께 할 수 있음에 마냥 행복하고 좋았다.
여튼, 사이월드의 시대가 지고 나는 익명의 웹속으로 들어갔다. 이제 누군가와 관계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사이버상에서 인사를 나눈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때쯤, 친구의 친구가 만들었다는 페이스북에 가입한지 4,5년이 지났다. 그리고 팡! 드디어 페이스북에 그 모든 웹의 지인들이 다시 흘러들어왔다. 이번에는 전세계에서 말이다… 그 폭발력이 실로 놀라운 이유는, sns 라는 약명을 달고, 새로운 모바일 문화와 함께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제 온라인 월드는 선택이 아니라 공기처럼 우리곁에 있는 일부이다.
이 세계에선, 사람들을 한정적으로 관계짓고, 그 레벨을 정하는 것 자체엔 의미가 없다. 이 세계는 속도전쟁, 재치전쟁, 순간의 전쟁인 것이다. 이 얼굴없는 얼굴책은 트위터와 함께, 순간을 끊임없이 소비하는 수다로서 그 생명을 이어간다. ‘지금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여기에서, ‘무엇’은 그닥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 바로 지금 이순간이 중요하다.
그 ‘순간들’은 빠르게 퍼져나간다. 진실도, 거짓도, 절망도, 희망도 순식간에 전염된다. 우리는 이 ‘순간의 미디어’에 갖혀, 우리가 관심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만 듣고, 남들의 논쟁을 재미나게 지켜보며, 논리적이고 도덕적으로 느껴지는 어떤 말들을 지지하며 가끔, 히히덕거리며 좋아하면 그만인 것이다. 이제 페이스북에서 소식을 알리고 안부를 묻는 것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페이스북에서 휴가를 가며, 페이스북에서 연애발표도 하고, 페이스북에서 아이도 낳는다.
이전 미디어들에도 이러한 기능은 있었지만, 지금은 보다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다. 사진과 비디오로 생생하게, 바로 이순간을. 이집트의 시위를, 월가의 투쟁을, 광화문의 촛불집회를 한 타임라인에서 지켜보며 세계의 흐름을 읽을 수 있고, 누가 어떤 정치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는지, 누가 이 미디어에 적극적으로 ‘놀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전 미디어들보다 훨씬 위험한 지점은, 바로 유비쿼터스, 언제 어디서 아무때나 순간을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한번 걸러내고, 생각해보고, 의논해보고, 변화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사고과정은 어떤 미디어에 쏟아낸다 한들, 사실 그 인간의 논리적 사고과정, 발언의 과정에 기대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확실히 빨라졌다. 모든 것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순간을 저당잡히고, 깊은 고민과 자가당착에 봉착하는 시간은, 아마.. 인터넷이 안터지는 순간들 뿐일 것이다.
그룹메일에 동봉하는 안부처럼, 페이스북에는 성의없이 내던지는 수많은 시간들이 존재한다. 웹과 미디어의 세계는 생명체처럼 자신의 오가니즘을 가지고 확장하고 변화한다. 언어가 가지는 시간과 공간을 인력으로 잡아둘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어쩐지 마음이 서늘하고, 페이스북의 Like 버튼이 시시한 동의처럼 느껴진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읽을거리, 생생한 정보, 재미있는 말들을 구경하며, 나는 할 말을 잃어갔다…
재치있는 말로 흘러가는 속도에 맞출수는 없고, 그동안 쌓아두었던 감정들을 내 집 블로그에 쓰기로 했다. 몇년 동안, 나는 출판이 정해진 원고가 아니고서는 온라인에 글을 쓰고 리뷰를 적는 일을 하지 않았다. 미디어에 대한 회의도 있겠고, 언어에 대한 두려움, 삶에 대한 망설임도 있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누가 읽는지 알 수 없고 소통을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불확실함이 나를 침묵하게 했던 것 같다.
블로그는 언제나 있어왔고, 늘 뭔가 끄적거리다 말거나, 생각나는 것들을 파편적으로 놔버려 두었었지만, 이제부터는 조금 긴 글이라도 끝까지 사고하고 그 기록을 남기려 한다.
* More Reading;
Vonnegut and Clancy on Technology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