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를 재현하는 리히터의 선택. Gerhard Richter, Panorama

테러를 재현하는 리히터의 선택. Gerhard Richter, Panorama

리히터는 2001년 9월 11일 뉴욕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리히터가 탄 비행기는, 캐나다 핼리팩스에 도착한다. 그 시간, 뉴욕으로 간 비행기는 뉴욕의 빌딩에 부딪히며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세기의 테러의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되었다.

리히터에게도 결코 잊을 수 없을만한 이 장면을, 재현하여 그림에 담아내고자 하는 목소리들이 많이 있었다. 비행기가 건물에 부딪히며 성냥갑처럼 부서지는 장면, 폭발과 함께 회색 재의 꽃이 팡 터지는 장면, 두 빌딩이 무너져 내리며 온갖 회색 먼지와 잿빛 하늘이 온통 거리를 뒤덮고 사람들이 거리를 뛰어가는 장면. 뉴스는 그런 드라마를 담아내며 테러의 잔인함을, 긴박함을, 도시의 재앙과 갈등의 폭발을 선전했다.

리히터는 5년뒤에 ‘september’ 라는 제목으로 몇몇 드로잉과 작은 페인팅을 내놓았다. 리히터의 대대적인 회고전을 연 테이트는 그야말로 호황이어서 줄을 서서 그림을 봐야 할 정도였다. 전시관을 빽빽하게 채우고도 다 못보여준 것 같은 느낌의 전시였다. 그리고 이 작업은 눈여겨 보지 않으면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다른 작업과는 비교되게 작은 사이즈였다. 캔버스에는 파란 하늘에 두 건물이 있고 비행기가 한 대 부딪히고 난 직후를 묘사했다. 리히터 특유의 blur와 squeegee (그림 위에 고무롤러를 사용해 문지르는 기법)가 보인다. 그것은 리히터가 선택한 9/11의 순간이다. 그림에는 예리한 칼로 중간 중간을 물감 사이로 그어 놓았다.

Richter's September (2009). (Photo: Courtesy of the artist and Marian Goodman Gallery, New York/Paris)

격동의 시기를 겪는 우리는 누구나 자기 삶에 크고 작은 테러나 재해를 소화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테러의 경험에는 그 속에 속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늘 ‘What If’ 의 가상 시나리오가 존재한다. 나역시 2005년 런던 테러 현장을 가까스로 피해 집에 돌아와 가슴을 쓸어내리며 수많은 ‘What if’ 시나리오를 생각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늦지 않았더라면, 구두대신 운동화를 신고 나갔더라면. 그 때 그 꽉 찬 버스를 사람들을 제치며 탔더라면. 사상자를 낸 지점은, 내가 매일 같이 버스를 타고 다니던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 외에는 다른 길로 가는 버스가 없었다. 경험을 피해가는 것은 노력이나 선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테러 자체는 수행적이고, 내재되어 있던 폭력을 해결하는 일종의 폭력적인 해결책인 점에서, 테러의 내부자도 외부자도, 피해자도 공모자도 모두 테러 속에 함몰 될 뿐이다.

리히터가 평생에 걸쳐 고민한 주제는 ‘vision’ 이다. 시각적인 반영, 눈에서 흐려지고 없어지는 것들, 분명하다 생각했던 자상, 또 기억과 그것을 재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그런 관심사는 나중에 더 확실하게 된 것 같고, 초기에는 그냥 그림을 잘 그리다 보니 더 그리게 되고, 더 그리다 보니 흥미로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구분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Record Player (Plattenspieler). 1988. Oil on canvas, 62 x 83 cm

리히터의 그림들 중에 흑백사진들을 그의 방식으로 다시 표현한 일련의 Red Army Faction (RAF) 테러와 관련된 시리즈는 그가 보다 진지하게 정치와 테러라는 주제에 접근했음을 보여준다. RAF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일의 젊은 대학생들로 구성된 좌파 테러조직단이었다. 폭력과 전쟁 속에서, 폭력자를 처단하고, 나은 세계를 바라던 젊은이들에게는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도시게릴라적인 행동들은 사회문제거리였다. 그들은 대부분 자살하거나, 처형되었다. 독일의 정치적인 지형도는 오늘날 세계 지형도, 혹은 아시아 지형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지만, Baader-Meinhof Group 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것은 사실이다. 사회와 관계맺고, 자신의 생명을 바치며 공동체를 형성한 그들의 혁명성은 과감했고 진정한 것이었다. 그들과 관련된 영화, 미술, 음악, 행위미술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중에, 리히터는 가장 먼저 그들을 자기 작품에 담았다. 잡힌 (captured) 테러리스트는 그의 재현에서 잡히지 않는 (un-captured) 초점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이 미친 시절의 젊은 영혼들에 대해 슬픔을 가지고 있었다.

1988년에 만든 Baader-Meinhof 연작은 15장의 흑백사진들로부터 시작한다. 그림 속에는, 테러범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젊은이들이 그들의 청춘을 검고 흰 그림자 사이로 뿜어낸다. 아마 큐레이터 노트를 읽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Jugendbildnis" 1988. Oil on Canvas 72.5 cm X 62 cm

Confrontation 1 (1988) by Gerhard Richter

리히터의 작품과 함께 사진의 시대, 이미지의 시대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다. 리히터가 만들어낸 추상적인 이미지 안에는, 그가 작품안에서 학습하고 문제삼았고 재현했던 사진의 이미지들이 뭉개지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작업들 중에서, 그러한 리히터의 과정을 본격적으로 보여준 방이 있었다. 리히터가 페인팅한 캔버스를 사진으로 옮기고, 사진을 다시 캔버스로 옮기는 작업을 연달아 한 것을 아카이브 형식으로 전시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파노라마라는 제목이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과정의 방은, 관객들에게 잠시 쉬어가는 방의 느낌을 준다. 가까이에서 천천히 볼 사람은 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음 방으로 옮겨가도 좋은 길목에서, 한켠에 번역본을 놨지만, 그걸 읽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러나 작업하는 사람으로서는, 그런 과정의 방이 사실 참 재미있다. 걸작이 나오기까지 무수히 그린 낙서, 노트, 의심을 가졌던 순간들, 그런 것을 엿보는 느낌이랄까.

그런 매체의 탐구를 거치면서 리히터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공고히 했다고 할 수 있다. 서양미술역사에서 많은 화가들이 예리한 눈을 가지고, 아름다운 색깔, 완벽한 구도를 표현해왔다. 리히터가 그런 페인팅의 21세기를 이어가는 인물임은 틀림 없을 것이다. 다만, 지금의 미술, 우리는, 혹은 나는, 그러한 아름다운 이미지를 그리는 화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만큼 흘러 넘치는 것이 좋은 이미지다. 예술적 심미안을 가지고, 자신이 무엇을 주제로 삼을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 것인가, 표현하고 사고하는 것이 함께 물려져 있는 것이 오늘의 미술이다.

리히터는 집안에 하나 걸어두었으면 하는 그림들, 구름연작, 베티, 누드, 각종 찬란한 추상적 이미지를 많이 만들었다. 그것이 아마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팔리는 리히터의 전술이라면 전술일 것이다. 전시가 끝나고 샵에서 집중적으로 세일을 하는 것도 그의 여러 인테리어가 될만한 그림들 프린트였다. 이러한 상업적인 취향에 맞아떨어지는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에는 무언가 불안함을 느끼게 하고, 편안하게 볼 수 없는 비전을 흐트러트리고, 색깔 없는 공간 속에 테러의 메시지에 주목하는 작가의 혼성적인 목소리가 담겨있다.

 

ps.
RAF가 폭력적 테러단이었고, 시대를 역행했다는 점에선 정치적인 의견이 분분한 것이 사실이다. 2005년 독일정부에서 큰 예산을 들여, ‘RAF’ 에 대한 전시를 했을 때, 많은 논란이 있었다. 악명높은 게릴라 테러리스트를 찬양하는 전시로 관객들에게 불안감이나 혐오감을 줄 수 있다는 우려였다. 도시게릴라와 놀이, 예술가들의 참견과 목소리가 두려운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일까? 다음은 디자인 그룹 ff 가 만든 서울시를 조롱하는 표현이었다. 대대적으로 도시를 때려 부수고 화려한 옷을 입으려 애쓰는 도시 행정에 대고, 청소도구를 들고 나가 거리를 닦아 놓은 것이다.


 

급진적인 움직임에 대하여, 정치인들은 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아마 금방 사람들을 선동하여 세상이 어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세상이 ‘어찌’ 된다는 데에 모두가 이상향이 다른 것은 사실이다. 한정된 빵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나눠먹는 방법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것도 당연하다.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술은 정당성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vision’을 담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More Reading;

 

[fblike]